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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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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심장
 
12각에 대한 구체적 반응에 대한 질문이 있으셔서
깨달음의 자리는 어디인가에 대한 자료로서 이 글을 올려 드립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1879-1950)는 남인도의 성산 아루나 찰나에 살았던 이 시대의 스승이다.
그는 1879년 남인도의 티루출리에서 태어났으며 평범한 소년으로 생활하다가 17세 때 자연을 탐구하다순간적인 깨달음이 왔으며 어린나이에 성자로 변모되었다. 그는 세속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깊은 산속에 머무르며 우주와의 합일속에 천지를 관조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면 그냥 고요히 그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서 그윽한 자비의 눈길을 보내기만 하였다. 그러면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에 휩싸이며 자신의 내부에서 쌓였던 모든 장애물들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그의 발밑에 엎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각성된 빛으로 부터 발산되는 무한한 사랑은 바로 신의 사랑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응되었다.
1950년 열반에 들 때까지 그는 삶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으며.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는 파괴할 수 없는 실재와 비유할 수 없는 근원의 아름다움. 완전하고도 평화로운 삶, 그리고 천상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온 인류에 보여주었다. 그는 침묵의 힘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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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리쉬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바로 우리 육체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흐름에 있다고 일찍이
깨달았다.
이 흐름은 비록 몸과 연결되어 일어나지만 스스로 존재한다. 그는 직관적으로 이 존재 감이 가슴 중앙의 오른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영적 심장'이라고 불렀다. 훗날 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 경전에도 기술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근원적인 에너지의 원천을 직접 발견한 까닭에 이 에너지가 나디(nadi)라고 불리는 의식의 경로를 통해 어떻게 흐르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이 영적인 심장의 에너지는 마음에 반영된다. 그 다음에는 몸의 여러 부분들로 퍼진다. 따라서 마음과 몸은 심장에 의존하는 2차적, 3차적 에너지 원천들이다.

이 심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오해하여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믿을 수도 있다.
마하리쉬는 이것을 불 속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쇠막대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쇠막대기는 불 속에서 뜨겁게 달구어지며 불의 성질을 얻지만, 불이 사라지면 곧 식어 버릴 것이다.
의식 또는 에너지가 마음과 몸 안에 있는 것은 단지 몸이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마음이 다시 심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몸에는 영적인 심장의 반영된 의식이 있는 것이다.

영적인 심장만이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한다. 마하리쉬가 지적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생각들이 오직 이 영적인 심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생각들은 여기에서 씨앗의 형태로 묻혀 있다가 알맞은 상황을 만나 싹을 튀우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심장은 충만한 의식 또는 에너지이며, 동시에 모든 생각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것은 영적 수행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모든 수행의 목표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호흡이나 소리의 근원, "나-생각"에 대해 꾸준히 관조한다면, 마음이 안으로 들어가 그 근원인 심장 속에 잠길 것이다. 마음은 점점 정화되고, 점점 더 왜곡 없이 의식을 반영할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 마음은 순수해질 것이며 어떤 오염도 없이 의식을 반영할 것이다. 행위는 완전할 것이며. 존재의 기쁨을 늘 자각할 것이다.
이 또 한 가지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충만한 의식 또는 모든 곳에 가득 찬 에너지의 위치를 몸의 특정한 곳에 두는 데 대한 의구심이 있을 수 있다.

마하리쉬는 우리가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의식의 근원이 몸 안에 위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안과 바깥에 대한 모든 구분이 그치게 된다.
*******
1917년 8월 9일. 라마나 마하리쉬는 영적인 심장에 대하여 상
세히 설명하였다.
몸을 가진 존재들의 모든 생각은 영적인 심장에서 나온다.
그 심장에 관한 묘사는 마음의 개념들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나-생각"은 모든 생각의 근원이다.
"나-생각"의 근원은 영적인 심장이다. 이 심장은 우리 몸에서 피를 뿜어내는 내장 기관이 아니다.
이 심장을 뜻하는 흐리다얌(Hridayam)은 "이것이 중심이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참나를 나타낸다.
이 심장의 위치는 가슴의 오른쪽이며 왼쪽이 아니다.
의식의 빛은 심장에서 나와 수슘나(Sushumna) 경로를 통해 사하스라라(백회)
로 흐른다.

의식은 사하스라라로부터 온몸으로 퍼지며, 그 뒤에 세계에 대한 경험이 일어난다. 자신을 그 의식과 별개의 것으로 봄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사로잡힌다. 참나에 거주하는 자의 사하스라라는 오직 순수한 빛이다.

그것에 다가가는 어떤 생각도 살아남지 못한다. 대상들이 가까이 있어 지각된다 해도, 마음은 다름을 보지 않기 때문에 요가(하나임)는 방해받지 않는다. 대상이 감지될 때에도 자각이 확고한 상태를 자연스러운 상태라 부른다. 니르비칼파 사마디 상태에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이 없다. 온 우주가 몸 안에 있으며, 온몸은 영적인 심장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영적인 심장 속에 있다. 우주는 마음 안에 있을 뿐이며, 마음은 바로 영적인 심장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역사는 영적인 심장 안에서 정점에 이른다.
태양이 달에게 빛을 주듯이, 영적인 심장은 마음을 비춘다.
태양이 지고 밤이 되면 달빛만 보이듯이, 영적인 심장 안에 거
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만을 보게 된다.
의식의 진정한 근원이 자신의 참나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상들이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마음으로 지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내안에 신성이 있음을 아는 자의 마음은 한낮의 햇빛 속 달빛처럼 영
적인 심장의 의식에 녹아들어 있다. 지성을 뜻하는 프라갸나(p,ajnana)의 글자 뜻은 마음이지만.
글자는 이 말의 본질적인 의미가 영적 심장임을 안다. 지고의 존재는 영적 심장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차이는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
영적심장에 거주하는 자들에게는 이 지각이 나뉘지 않으며 하나이다.
기절이나 수면, 지나친 즐거움 또는 슬픔, 두려움 등으로 인한
사념이 강제로 멈출 때, 마음은 자기의 근원인 영적인 심장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몰입은 무의식중에 일어나므로 그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 한다.
이와달리, 의식하며 영적인 심장으로 들어갈 때, 그것을 사마디(삼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에 차이가 있다.
 
********질답********
 
여섯 아다라을 언급하셨습니다. 지바(개별 영혼)는 영적인 심장안에 거주합니까?
그렇다. 지바는 깊은 잠을 잘 때는 영적인 심장 속에, 깨어 있을 때는 뇌 속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적인 심장은 피를 내보내는 네 개의 심실로 이루어진 육체의 심장' 아니다.
경전들에서 말하는 영적인 심장은 "나"라는 개념이 일으나는 곳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즉 가슴의 중앙 오른쪽 어딘에선가 생겨난다. 그러나 사실은 "나"가 특정한 어디에 있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 심장은 "나"라고 여겨지는 우리의 온몸과 온 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적인 구도자의 수행을 위해 우리는 우주 또는 몸의 특정한 한 곳을 가리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영적 심장이 "참나"의 자리로 지적된다.
 
그렇다면 속박되어 있는 사람과 해방된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영적인 심장에서부터 힘의 자리인 사하스라라까지 이어지는 미묘한 경로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영적인 심장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머리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갸나 시다(jnana siddha)는 영적인 심장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돌아다니거나 사람 또는 사물과 관계할 때에도 자신이 보는 것들이 하나의 실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안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방금 얘기했듯이 그는 사물을 자기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깊은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자신을 지탱시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자기 존재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뒤에, 세상의 뒤에 하나의 실재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그는 그 하나를 실재로서, 모든 자아들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 안에 있는 참나로서,
덧없고 변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그것으로서 알고 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의구심이 하나 더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영적인 심장이 개별 자아의 중심이며 또한 진실한 참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영적인 심장은 자아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 자아는 일시적이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자아 역시 영적 심장 중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자아는 영혼과 물질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그것은 매듭이며, 사람들이 빠져 있는 근본적인 무지의 매듭이다. 적절한 수단으로 이 매듭을 완전히 잘라 버릴 때, 그대는 이중심을 발견할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이 중심에서 사하스라라까지 연결된 이동 경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통로가 닫혀 있지만,
자아의 매듭을 잘라 버린 사람들에게는 암리타나디(amritanadi)라고 하는 힘의 흐름이 일어나서,
머리의 왕관인 사하스라라를 향해 상승하게 된다.
 
이 통로가 수슘나입니까?
아니다 이것은 해방의 통로이다. 이것은 아트마나디,
브라마나디, 또는 암리타나디라고 불린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나디는 이것이다.
이 통로가 열릴 때, 그대의 무지는 그친다. 그대는 얘기하거나 생각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혹은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하고 있을 때에도 진리를 알고 있다.
 
 
*******
 
만약 참나의 위치를 몸의 어떤 장소에 고정시킨다면, 무한하며 어디에나
현존하는 참나를 유한한 것으로 한정하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참나가 육체 안의 영적 심장에 있다고 한다면, 육체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가 참나에게도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슈리라마도 바시슈타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바시슈타는 두 종류의 심장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디에나 현존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한정되며 '거부해야하는' 심장이다. 어디에나 현존하는 심장은 안에도 밖에도 있으며. "나는 몸이다."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그것은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다.
 
두 눈썹 사이의 지점에 주의를 집중하는 명상은 괜찮습니까?
영적 심장 중심이 있는데, 왜 그곳으로 곧장 가지 않고 다른 준
글을 거쳐서 가야 하는가? 첸나이에서 티루반나말라이로 가려는데.
왜 바라나시까지 먼 길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는가?
왜 곧장 가지 않는가?
********
1915년, 라마나의 박식하고 열련한 추종자인 자가디스와라 샤르츠리는 '심장 동굴의 중심에서'라는 뜻으로 "흐리디야 쿠하라 마디에"라는 구절을 쓴 뒤, 라마나에게 문람을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완성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심장 동굴의 중심에서 브라만이 홀로 빛난다.
참나는 그렇게 "나-나"로서 직접 체험된다.
자기 탐구를 통하여 혹은 호흡을 조절하여 그 심장 속으로 녹아 들어가라. 그리고 "그것"으로서 뿌리를 내려라.
******
 
영적 심장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심장은 영적 체험의 중심이다.
그대가 영적 심장의 위치를 묻는 까닭은 자신이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 위치가 육체에 있다고 하는 것이 진실이다. 여기에서 암시하는 바는 그대의 정체성
과 관련된 심장의 위치이다. 그대는 참된 의식을 찾고 있다.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자기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내면을 향하라. 영적인 심장은 자각의 자리,
혹은 의식 그 자체이다.

참나(眞我) 탐구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나"가 가리키는 것은 자아입니까, 아니
면 참나(atman)입니까?
이 질문에서 "나"는 자아를 가리킨다.
 
탐구를 하는 동안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자파나 만트라처럼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해야 합니까?
아니면 처음에만 한두 번 묻고서 그 후에는 마음을 자아의 근원인 심장에, 세속적인 생각들과 의심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까?
코함(koham)을 자파로 활용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한 번만 질문을 던지고 그 뒤에는 자아의 근원을 찾는 데,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데 집중하라.
 
탐구를 하는 동안 숨을 깊고 고르게 들이쉬고 내뱉도록 노력하면서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호흡과 결합시켜야 합니까?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반복하면서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만일 그대가 호흡과 상관없이 탐구에 집중할 수 있다면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그런 도움 없이 탐구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탐구를 하는 동안 케발라 쿰바카(kevala Kumbhaka)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규칙적인 프라나야마(pranayama)가 마음을 안정시키고 생각들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방편들의 도움 없이도 마음이 탐구를 지속할 만큼 충분히
강해지면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프라냐아마는 일상적인 주의로 행해야 한다. 그것은 쿰바카(호흡 멈춤)의 힘과 지속 기간을
점차 증가시킨다. 결국 그것은 마음을 한 점에 모이게 할 것이다. 프라나야마 없이 집중하기가 어려우면 그것의 도움을 받아라. 프라나야마는 마음이라는 야생마를 제어하는 고삐와 같고, 생각이라는 바퀴를 제어하는 브레이크와 같다.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질문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것이다. 진정한 참나의 경우에는그런 질문이 일어날 수 없다.
 
*******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 뒤에는 "나는 마음도, 지성도, 자아도, 기억도 아니다." 와 같은 슈리 샹카라의 가르침으로 대답하며 번갈아 묻고 답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할 때마다 "나는 쉬바다(Sivoham)."와 같은 공식으로 반복하여 대답해야 할까요?
명상을 하는 동안 그 질문에 대해 "쉬보함(나는 쉬바다)."과 같은 대답을 마음에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대답은 스스로 나올 것이다. 자아가 제시하는 어떠한 대답도 올바를 수가 없다. 이런 확언들과 자동 암시들은 다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탐구라는 이 방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계속하여 질문하면 대답이 나올 것이다. 탐구의 방법은 디야나다. 노력 없는 상태는 갸나다.
 
몸 안에서 근원을 찾아야 할까요?
자아는 몸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아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몸을 들여다보아도 괜찮다. 그러나 근원에 도달하면 안과 밖이 없을 것이다. 근원 혹은 참나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참나 안에 있을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앉는 시다사나(SiddhaSana) 자세, 혹은 사슴 가죽 위에 앉는 쿠샤사나(kushasana) 등이 탐구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탐구를 촉진할까요?
진정한 아사나(자세)는 "참나-실재" 혹은 근원 안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이다. 그대의 참나 안에 앉아라. 참나가 어디로 가서 앉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참나 안에 앉는다. "나"의 근원을 찾아서 그곳에 앉아라. 아사나와 같은 것들의 도움 없이는 참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관념을 갖지 말라.
그것들은 전혀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 은 탐구를 하여 자아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세 등과 같은 것들은 마음을 흩뜨려 그것들(육체적 음직임)이나 몸을 향하게 할 수 있다.
 
한가한 시간에 어떤 책들을 읽으면 스와디야야(swadhyaya,탐구를 위해 마음을
빨리 훈련시키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될까요?
어떤 책을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진정한 책은 참나다. 그대는 언제라도 그 책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아무도 그 책을 빼앗을 수 없다. 그 책은 늘 곁에 있어서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 한가한 시간에도 그대의 참나를 붙잡아라. 그러면 그대는 어떤 책이든 읽을 수 있다.
 
명상을 하는 동안 의심과 두려움, 걱정들이 계속 괴롭히면,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이런 의심과 두려움, 걱정들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그대 자신에게 물어라. 그러면 이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에게 관심을 주지 말라. 내면의 참나에게 관심을 쏟아라. 두려움과 같은 것들은 오로지 둘이 있을 때에만, 또는 다른 사람이 그대와 별개로, 그대와 분리되어, 그대 바깥에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참나를 향해 내면으로 마음을 돌린다면, 두려움과 같은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의심이나 두려움을 없애려 하면 다른 의심이나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나뭇잎을 하나씩 뜯어서 나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대가 몇 개의 이파리를 뜯는 사이에 다른 나뭇잎들이 자랄 것이다. 나무(자아)의 뿌리를 없애라.
그러면 나무 전체가 잎들 가지들과 함께 없어질 것이다. 예방이 치료보다 낫다.
 
명상을 하다가 가끔 스승님의 눈이나 얼굴을 응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눈을 감고 있어야 할까요?
집에서 혼자 명상을 할때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어떤 헌신의 대상에 눈길을 고정시켜야 할까요?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그대의 참나 혹은 아트만을 바라보라.
눈은 뜨고 있건 감고 있건 상관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나"뿐이다.
그것을 "나"라고 말하건 "눈"이라고 말하건 상관없다. 눈을 감거나 뜨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면의 "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대는 뜨거나 감을 수 있는 "나"가 아니다.
그대는 원하는 대로 눈을 감을 수도 있고 뜰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참나를 생각할 때는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실내에 있고 바깥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창문을 닫아놓건 열어놓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자이시여, 저는 스승님의 자기 탐구의 길(Vichara marga)에 관해 들
었지만, 그것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한 장소에 앉아서"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만트라에 대해 명상하듯이 그 질문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이 질문에 대해 명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대 안에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는 것
이며,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고 그 생각만 굳게 붙잡는 것이다.
꾸준하고 끈질기게 노력하면 결국 참나에 이를 것이다.

제가 알기로는 일어나는 생각들을 막는 데 완전히 성공하기까지는 참나
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생각들을 막을 필요는 없다 깊은 잠을 잘때는 생각들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깨어나면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자연히 다른 모든생각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일은 이 주된 생각인 "나"라는 생각을 붙잡고 그것이 무엇인지 관찰하면서 다른 생각들이 관심을 흩뜨릴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자기 탐구의 진정한 가치와 마음을 제어하는 효과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참나가 신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대는 어려움을 느낀다. '참나를 아는 것'인 자기 탐구는 "쉬보함(나는 쉬바다)"이나 "소함(나는 그분이다)" 명상법과는 다른 방법이다. 나는 참나 지식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과 관련되어 있으며, 세상과 신을 아는 일은 그 다음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함"명상이나 "나는 브라만이다"명상은 어느 정도 정신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자기 탐구는 직접적인 방법이며, 다른 명상법보다 확실히 나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기 탐구의 흐름속으로 들어가서 더욱더 깊이 들어가는 순간, 진정한 참나는 그대를 맞아들이기 위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루어지는 일들은 모두 다른 무엇에 의해이루어지며, 그대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모든 의심과 논의들은, 마치 그대가 잠들었을 때 모든 근심들을 한동안 잊듯이, 자동적으로 잊혀진다.
 
다른 무엇이 그곳에서 저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
할 수 있습니까?
그대가 충분히 발전하면 자연히 확신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정도로 발전할 수 있습니까?
다양한 대답들이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발전 정도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 탐구는 그 발전을 더 빨라지게 한다.
 
그것은 순환 논법입니다. "나는 발전했기 때문에 탐구를 잘할 수 있다.
탐구 자체가 나를 발전시킨다.?"
마음은 항상 이 같은 어려움이 있다. 마음은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어떤 이론을 원한다. 진지하게 신에게 다가가기를 원하는 사람,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어떤 이론도 필요치 않다.
 
******
 
한 방문객이 명상을 하는 동안에 자신의 상상의 자아와 싸우는 동안 큰 어려움을 경험한다. 그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 스승을 찾아온다.
 
저는 명상을 하면서 거짓된 '나'를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
어떻게 "나"가 스스로 자기를 없앨 수 있겠는가? 그대가 할 일은 오직 그것의 근원을 찾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대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명상 중에는 마음의 활동이 한 점에, 명상이 대상에 모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다. 마음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생각의 통로들 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많은 생각들로 산만해지는 마음의 이 습성을 극복하고 생각이 없는 본연의 상태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상동안에 마음을 방황하게 하는 것은 참나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대상들에 대한 마음의 집착이다. 그러므로 참나 아닌 것들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야 하고, 마음이 자기 탐구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대가 "탐구를 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한 가지 질문에 온 마음을 맞출 때, 나머지 모든 생각들은 효과적으로 제거된다.
 
탐구의 결과로서 "나"는 참나 아닌 것들 즉 몸, 감각, 감각 기관들에 의해 지각된 대상들과 본질적인 관계가 없다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참나 아닌 것을 이루고 있는 바로 이런 것들 뒤를 계속하여 따라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또 어떻게 해야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꾸준한 수행, 집착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자기 탐구가 한결같아지고 신성에 확고해 지면, 그대의 마음은 참나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는 습성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한결같이 탐구할 수 있을까요?
매일 호흡을 하듯 탐구(명상) 역시 일상화하라.
탐구는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다가갈 수 록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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