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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없는 비오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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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살짝 뿌린 오후 내리막길 신호등 앞에 정차해 있던 나를 뒷차가 받은 것이다. 

눈에  띄는 차의 손상은 없었지만 넋 놓고 파란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젖혀지며 놀랐다. 

뒷자리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우리 개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후 나는 카이로프래틱에 점검을 받으러 갔다. 엑스레이를 몇 장 찍고 몸상태를 체크하던 닥터 김은 내 이름

과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며 말을 걸었다. 

아마도 몇달 전 딸아이도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닌 것을 기억하기에 비슷한 인상 때문이라 생각했다. 

치료를 받고 집에서 해야할 처치법을 들었다. 

자신이태어나 성장한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살아가며 잊히지 않는 곳을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고향은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고 황금 물결을 이루는 황혼의 들녘같이 정겹다. 살다가 힘들고 지칠 때면 고향을찾고 싶다. 
물씬풍겨오는 흙냄새가 향긋하고 공기마저 다디단 고향. 인정과 그리움이 있기에 우리 본성이 태어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향하면  일반적으로 농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집 뒤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고 밤이면 산 위로 달이 떠 오르고, 초가집 
지붕의박꽃이  달을 향해 그리운 가슴 살포시 열어 보이는곳. 집 앞 가까운 곳에 맑은 시내가 흐른다면 더 할 말이 없겠고 푸른 
들판에서어린  송아지가 음 메-하고 어미 그리워 우는 그런 관념적 정경을 생각한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고향이 없다는  말을 곧잘 하는 것도 그 같은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 같다.
내가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개성이다. 어려서부터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방학 때면 으레 할아버지 댁에서 
한달간  머물다 왔다. 그래서인지 내 유년 시절을 추억하면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늘 개성 친가에 고정되어 있다. 송악산 
기슭의  평화로운 마을, 집 뒤란에서는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고 연꽃이 눈을 뜨는 연당 옆으로 삼 포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던 보랏빛 꽃 동네, 송씨가 많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송촌 마을이다.
첫아이가  태어나고 6개월 후에 화곡동으로 이사했다. 그때 화곡동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계절과 맞물려 신도시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 속에 전원도시를 이룩해 놓았다. 빨강 파랑 지붕을 머리에 
이고옹기종기  모여 있는 400여 채의 집들이 마치 동화속 이야기 같았다. 신문은 이곳을 멋지게 광고하여 내 흥미를 끌 었다.'전설적인 전원의 도시 화곡동.' 로맨틱한 슬로건을 내세운 국민주택의 선전 광고이다.
10여만 평의 대지에 핵가족이 살기에 알맞게 현대식으로 주택을 지어 놓았으니 복잡한 도시를 떠나 이곳 전원주택으로 
오라는 슬로건이다. 집을 사려는 계획이 전혀 없던 때였으나 이색적인 타이틀에 매료되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전설 속을 
오르내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대로 드디어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었다. 시숙께서 주택을 분양받아 우리에게 주셨는데 예의 그 전원주택이었다.
이사온  집 주위는 별천지였다. 뒤쪽에 등산하기 알맞은 낮은 산이 있고 산 밑으로 작은 개울이 흘러서 아이들이 물장난치며 
놀기에  마침이었다. 인근 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신선하고 개나리로 울타리 처진 딸기 농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익어 가는 딸기가 바람 불 때마다 달콤한 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딸기를 직접 따서 사 오는 것이 재밌었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교통수단과 포장이 안 된 도로였다. 신도시라 잘 알려지지 않아 화곡동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시내에 
나갔다  들어올 때 택시를 잡으면 거절하기 일쑤였다. 웃돈을 얹어 주어도 빈 차로 나온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버스도  하루에 몇 차례만 드나들었다. 논을 메워 세운 도시라 비가 오면 아스팔트가 깔린 큰길가를 제외하고는 발이 푹푹 빠졌다. 
오죽했으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마는 불편함은 동적일 때뿐이고 자연 속에서  사는 정신적 풍요가 삶의 생기를 더했다.
새집으로  이사 오고 몇 달 후, 첫아이의 생일이 되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텅 빈 마당이라 첫 돌 기념으로 나무를 심었다. 
가장  종류가 많고 품질이 우수하다는 수유리 장미원에서 흑장미 묘목을 사 왔다.첫돌 기념식수 '장미 1호'가 탄생하였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입학이나 가족의 생일, 집안의 경사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를 심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원의 
나무는 무성했고 예쁜 꽃들로 무지갯빛을 더했다. 대문에 아치를 이루고 기어오르는 노란 줄 장미가 탐스럽고 그 아래 
사열하듯 줄지어 선 빨간 미니장미가 앙증스럽다. 채송화로 울타리 친 꽃밭에 활년, 봉숭아, 분꽃, 베고니아가 곱고 목련,
라일락, 흰 철쭉, 향나무, 진달래가 있어 우리 집 정원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첫번  피는 장미는 크기가 어른 주먹만 하다. 꽃대를 쭉 올리며 겹겹이 포개진 꽃잎을 조금씩 열어 보일 때 그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은은히 스치는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나 꽃 중의 여왕격인 장미라도 
비를  만나면 맥을 못 춘다. 커다란 꽃잎 사이사이로 스며든 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고개를 떨군다. 
처음  몇 해는 비를 맞아 축 늘어져 있는 꽃을 보면서 속수무책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피자마자 비가 온다든지 날씨가 조금만
꾸물거려도  걱정되었다. 고심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비가 밤중이나 갑작스럽게 내릴 때는 어쩔 수 없으나 예보가 있을 때는 
미리  비닐봉지로 장미꽃을 싸서 묶어 놓는다. 그 일도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때는 비를 흠뻑 맞아가며 작업하다가 
감기가  들었고 서둘다가 가시에 찔려 고생한 적도 있었다. 또 다 싸 놓고 나니 오후에 해가 쨍쨍해서 푸느라 애썼으나 
효과를  본 때가 더 많았다. 나의 장미 싸기는 기쁨의 작업이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부모님께 이런 정성을 들였다면 효녀 상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으리라.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골목길까지 누나의 음성이 들렸다.'감기들면 어찌하려고 그래,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엄마 오시기 전에 옷 갈아입어야지.'
누나 이야기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큰 아이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 '누나, 비와.' 하며 우산을 꺼내서 장미꽃을 바쳐주고 있더란다. 온몸이 비에 젖어 덜덜 떨면서도.
아이는 나를 보자 울음보를 터뜨렸다. '엄마같이 할 수 없었단 말이야.비가 올 때마다 곁에서 비닐과 끈을 집어주던 큰아이는 엄마가 하던 일이 생각나는데 혼자서 어쩔 수가 없으니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날 나는 장미 1호 앞에서 울고 있는 아들의 마음이 예뻐 한동안 말없이 꼭 끌어안아 주었다. 동네 화원 앞을 지날 때면 큰아이는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엄마,' 꽃은 참 예뻐 그 치.' 말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린다.'엄마는 우리 아들보다 더 예쁜 꽃을 보지 못했네.' 그럴 때면 잡은 손을 세차게 흔들며 씩씩하게 걷는다. 아들이 무척 귀엽다.
우리  집 마당의 나무들은 각각 주인이 다르다. 나무마다 고유의 번호와 이름표를 걸어 놓았다. 언제 어떤 일로 한 
식수인지  간단하게 적어 놓았다. 식구들은 자신의 나무에 물을 주고 풀도 뽑아주며 정성을 기울였다. 그래서였을까. 
정원에  서면 꽃들의 맑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향기로운 미소가 노래처럼 번졌다.
큰아이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꿈을 키워온 화곡동 집에서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통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학교 근처로 갔다.'엄마, 꽃나무도 가져가나요?''아니, 우리가 이사 갈 집에도 나무가 많아 두고 가기로 했어.'
큰아이는 동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지만, 자신의 이름표가 달린 나무들을 두고 가는 것이 더 섭섭한 것 같았다. 
그것은 나무마다 사연이 있고 그 나무와 함께 커왔기에 정이든 탓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사 가기 전날, 큰아이는 
자신의 나무에서 번호와 이름표를 떼어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새로  이사 간 집에는 마당 한쪽을 다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등나무가 있었다. 마침 우리가 이사할 때 등꽃이 활짝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보랏빛 물결이 출렁거렸다. 정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사과나무에는 아직 익지 않은 화초 사과가 한 
꼭지에  5, 6개씩 열려있어 파란 등을 달아 놓은 것처럼 운치가 있다.
큰아이는  새집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커다란 방을 쓰기 편하게 꾸며 줬으나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끔 주말이면 
외출했다가  돌아왔고 그런 때면 옛 동네에 가서 우리가 살았던 집도보고 친구도 만나는 듯싶었다. 해가 바뀌고 늦추위가 
심했던  어느 일요일, 종일 집을 비운 큰아이가 땅거미가 질 때쯤 들어왔다.
'엄마, 우리 집은 없어지고 커다란 이층집이 생겼어. 나무도 다 없어지고.'
신을 벗지도 못한 채 황급히 뛰어들어온 큰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떠나온 곳의 변화된 모습에 자신의 추억이 없어진 
같았을까.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함께했던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져 허무와 충격이 컸던 것 같다. 아들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우리가 두고 온 것에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잘 안다. 다만 그곳에 두고 온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방문을노크했으나 반응이 없다. 저녁도 거른 채 그냥 잠이 들었는지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흐느낌을 꿈속에서 들은 것 같다. 그제야 비로소 이사 올 때 첫 돌 기념 장미 1호와 몇 그루의 장미를 챙겨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엄마,꽃나무도 가져가나요?' 아들의 말이 다시 가슴을 파고든다.
'내가 내 장미꽃을 위해 보낸 시간 때문에 내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여진 것, 내가 물을 주어 기른 꽃이니까, 내가 직접 
덮개를 씌워주고 바람막이로 보호해 주었고, 벌레를 잡아준 것이 그 장미꽃이니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왜 이제야 생각나는 걸까.
우리가족이 이곳에 산 지 10년이 되던 해에 장성한 아들과 함께 서울엘 갔다. 나는 어머니 뵈러 자주 다녔으나 큰아이는 
미국으로 온 후, 처음 나선 나들이였다. 아들은 옛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분주한 가운데도 어느 날 인가 화곡동을 다녀온 
듯싶었다. 눈에 익은 건물은 화곡초등학교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아들은 어렸을 때처럼 고향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뭇없이 사라진 옛집이 허망하여 울먹이던 슬픈 눈망울의 
소년은 이미 아니다. 유년의 꿈을 키워온 그곳이 낯설게 변한 현실에, 잃어버린 동심이 안타까워 입을 다물고 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으니까. 이제는 담담한 마음으로 예전에 살았던 곳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학교에 다녀본 적은 없으나 
유일하게 화곡초등학교가 남아 있다는 위로를 받으며. 비록 눈에 보이던 고향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의 우리 집은 갖가지 장미가 많아 장미의 집이라 불리던 곳. 커다란 
그네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노을을 보며 황홀해 하던 곳. 밤이 맞도록 별을 세며 별들의 이름을 불러 보던 곳. 
정원 한 귀퉁이에 어쭙잖게 놓여있던 미끄럼틀 모래밭에서 강아지와 함께 뒹굴며 지내던 곳이기에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어릴 때 몸과 마음이 자라며 처음 접한 곳이었고 꿈꾸고 자라던 시기였기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 향수가 사무칠 때면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다는 것,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마음 깊숙한 곳에 아들의 고향은 예전의 모습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훗날 아들은 자녀에게 아빠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안개빛 눈망울이 되어 기억 저 너머를 더듬으며 행복한 동심 
속에 빠져 있겠지.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가 진리처럼 다가오리라.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니까“아빠는 내가 힘들 때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남편의 생일에 아들이 그림 한 장을 그려 아빠에게 주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의자 하나 동그마니 그려져 있는 그림. 
그림에 아빠를 향한 사랑과 신뢰를 담았습니다. 백 마디의 말이나 어떤 표현보다도 짧고 굵직한 한마디에 남편은  세상을 얻은 것 같이 가슴 벅찼을 겁니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메일의 첫머리다. 온갖 지상적 고된 삶을 잊게 해주는 글. 10대 초반 소년의 글이라 하기에는 
심오하다. 아버지를 정신적 지주, 스승,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넓은 품으로 생각하는 아들의 삶이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현대를 사는 많은 아버지가 자녀로부터 이런 마음 한 자락 받는다면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리라.
급속도로 발전하는 첨단 시설물들. 손가락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 컴퓨터가 만물박사고 스마트 폰이 요술 방망이처럼 
척척 알아서 해결해 준다. 아이들이 부모와 대화 시간을 갖고 뭔가를 진지한 마음으로 의논하기보다는 언제나 손안에 
있는 기계에서 먼저 해답을 찾으려 든다. 대가족이 함께 살던 시절의 며느리들은 단출한 핵가족을 얼마나 꿈꿨던가.  요즘은 서너 명 가족끼리도 서로 얼굴 보며 식사하는 것을 별러야 하는 시대다.
현대는 첨단 제품 덕택으로 인력을 최소화하면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급속도의 성장이 좋지만은 않은 것은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어느 것에나 장단점이 분명하게 따르게 마련이다. 한 직장에 평생을 몸담던 우리네 아버지와 
달리 요즘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명퇴, 조퇴라는 명목으로 타의에 의해 퇴직하게 되는 것이 이에 
따른 부산물이다. 아버지의 권위도 전 같지 않다. 흔들리는 것이 가장의 권위다. 거기에는 여성도 얼마든지 어깨를  겨누며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기에 수요 공급에 균형이 깨진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는 노래를 이따금 TV에서 듣는다. 어린아이의 재롱으로 보기에는 현실적인 
서글픔이 짙다. 누구나 잘사는 삶을 바라고 원할 것이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주변에 의해서, 타의에 의해서 내 뜻대로 살 수 없는 
경우도, 노력해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자녀만 해도 그렇다. 편히 쉬게 의자가 되어 주어도 자녀가 쉬려  들지 않을 수 있겠고 지친 다리를 끌고 와서 쉬려 해도 품을 열지 않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농사 중에 으뜸이 흔히 자식 농사라 한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라 해도 자녀가 제대로 몫을 다하지 못한다면 
부모의 어깨는 처지고 자녀 이야기가 화두에 오를 때면 시선이 아래로 향할 것이다. 자녀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부모,
자라 주어 번듯한 일가를 이룬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가 인생 성공자가 아닐까. 우리 아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였을까.
나이 들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이따금 드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나는 편안한 엄마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감상적이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더구나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 남편과 오래 떨어져 살았기에 아빠의 빈자리를 
메꾸어 주려고 예 체능에 이르기까지 전인교육을 염두에 두었다. 내가 처한 상황보다 좀 더 나은 교육 방법을 택하려 
애썼고 정성을 쏟는 만큼 아이들이 잘 따라주기 바라는 보상 심리도 있었다. 당시에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한 마음이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피곤했을 것 같다.
오늘 지인의 메일을 받고 나니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남편과 나는 과연 어떤 의자였을까. 
부모를 필요로 하는 초등학교 시절, 외국에서 근무하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살게 한 것이 미안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보호자라며 든든하게 지켜주고, 착하고 바르게 잘 자라준 두 아들. 긴 세월이 지났건만 이따금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곧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즐겨 꺼낸다.
‘난 엄마가 계모인 줄 알았어, 어찌나 무섭게 굴었던지’하고 말하는 작은아들. ‘엄마의 꾸중이 아빠 몫까지라고 생각했다’는 큰아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늦게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겨울이면
이미 연탄난로 가에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던 일, 따끈한 차를 마시며 아빠가 보내 준 그림엽서 속으로 들어가 함께 여행하는 듯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시절이 그립단다.
뿌리내리고 불혹을 넘긴 아들이지만 언제나 와서 편하게 쉴 수 있는 의자가 되고 싶다. 세월이 눈처럼 쌓이고 녹아도 삶 속에서
이른 피어난 신뢰를 연주하는 부모, 그런 부모가 되고 싶다 언제부터 비롯된 버릇인지 몰라도 나는 창가에 앉기를 좋아했다.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음률의 흐름에 마음을 싣는다. 차츰 고조되는 연주, 악기의 독특한 음색이 세분되어 들리고 
전체적인 조화에 빠져든다. 같은 음악이라도 들을 때마다 감상과 감동이 다르다. 이것이 음악이 지니는 신비의 마력이다.
바다의 노래, 숲의 속삭임, 바람의 이야기가 들리고 이국의 어느 호젓한 호숫가나 설산을 헤매기도 한다. 음악은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게 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을 이해하게 한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 파도를 탄다.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이
음악을 집어 드는 것은 하루가 꿈처럼 펼쳐지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랑의 꿈’을 처음 들었던 것은 여학교 시절이다.
저녁 늦게 무용 연습을 끝내고 나올 때면 누군가가 그때까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텅 빈 교정은 낙조와 함께 스며드는 
어스름 속에 쓸쓸함이 번져 있었다. 열정을 다해 두드리는 음률이 시간을 정지시켰다. 비애가 넘치는 선율이지만 음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살아 있었다. 분위기가 그래서일까 처음 듣는 곡인데도 극적인 감동을 선사해 준다.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이 흐느낌처럼 잠시 허공을 머물다 스러진다. 소리를 삼켜 버린 공간에 아쉬움이 남는다. 정인을 
두고 떠날 때처럼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을 누군가 들어줘야 할 것 같다. 그림자도 멀어져 가는 
교정에서 피곤함에 지쳐 비척이고 있던 내 영혼에 서서히 생기가 감돈다. 단 한 사람의 관객이 되어 마음을 내려놓는다.
로맨틱 ‘사랑의 꿈’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축축이 젖어 지나간 시절이, 잊힌 가슴의 고동이 되살아난다. 독일의 
노인들은 ‘사랑의 꿈’을 들으므로 다시 젊어진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즐겨 찾는 카페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눈에 생기가 돈단다. 먼 옛날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꿈꾸는 눈빛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음악은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황혼기의 노인들에게 설렘을 맛보게 하는 신비한 곡이라 말할 수 있겠다.
가장 아름다운 소곡으로 알려진 ‘사랑의 꿈 제3번’은 독일의 혁명 시인 ‘프라이리 그라트’ (Frailigrath)의 서정시 
‘오, 사랑이여’의 한 편에 곡을 붙인 것이다. 후에 피아노곡으로 편곡되어 가곡과 함께 유명해졌다. 시에 대한 감명과 
멜로디에 중점을 두어 시적인 사랑의 진실을 노래한 무언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곡에 담긴 사랑의 감격은 매우 
깊은 ...ㅠㅜㅜㅜㅜㅜㅜ
냉정하다. 인상을 준다. 리스트의 피아노곡은 남성적인 색채가 짙다. 타오를 때는 불꽃처럼 타고, 조용해질 때는 얼음처럼 
‘사랑의 꿈’의 원곡은 가곡 ‘고귀한 사랑’, ‘가장 행복한 죽음,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이다. 
리스트는 이 3곡의 가곡을 피아노 소품의 장르인 녹턴으로 편곡하여 1850년에 ‘3곡의 녹턴’이라는 타이틀로 내놓았다. 
그중에서 3번째 곡만이 ‘사랑의 꿈’이라는 부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곡인 성악곡은 3곡 모두 소프라노나 테너를 위해서 작곡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선율이 지극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데 
이것이 피아노로 재현됨으로 리스트 피아니즘이 표현하는 지순한 아름다움에 빛을 더하게 된다. 고도의 연주 기법이 요구되는 화려한 작품이라 하겠다.
텔레비전 아트 채널(Arts Channel)에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아더 루빈스타인’(Artur Ruinstein)의 연주 
‘사랑의 꿈’을 보여 주었다. 주로 음악과 발레를 선보이는 쿠르트 인터내셔널 필름(Kultur International Films)의 
1947년 작품이다. 그는 다소 근엄해 보이는 얼굴을 약간 치켜들고 시선을 지긋이 아래로 고정한 채 고요를 캐어내듯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중 동이라 할까. 조용히 흐르는 음률.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듯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표정은 이미 한 마리 
새가 되어 건반 위에서 날고 있다. 중반부를 지나며 손등에 불끈 솟아오른 힘줄 만큼이나 활기찬 연주가 계속된다. 
몸놀림이 갈대의 몸짓처럼 흔들리고 있다. 60세의 노인답지 않게 열정이 넘쳐났다. 이제까지 지내온 삶의 굴곡. 
비바람 치는 계곡과 능선을 지나며 넓은 바다의 일엽편주 되어 파도와 풍랑과 맞서 싸우는 듯한 격정적인 연주였다. 
이윽고 하반부로 접어들며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안온함이 잔잔하다. 인생의 황혼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넉넉함, 인생을 달관한 이의 모습에서나 찾을 수 있는 평화로움이 여운처럼 번진다. 그의 연주에 얼마나 깊이 심취되었던지  연주가 끝나자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가의 연주는 바로 이런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에서 풀리는 여유로움. 우아한 영국의 장미라는 별명을 지녔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가 그랬고 시대의 고난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피아노의 성녀 ‘클라라 하스킬’의 천의무봉 한 
연주가 그것이었다. 로맨틱한 연주로 정평 있는 지중해의 바이올리니스트 ‘지노 프랑체스카티’. 16세에 실명했음에도  
바흐의 오르간 작품 전곡을 녹음하여 레코드 사상 불멸의 기념비를 세운 파이프 오르간 주자 ‘헬무트 발햐’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그 완벽함에 질려 전율이 인다. 새로운 토스카니니로 알려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 또한 신들린 
자의 모습 같지 않던가. 가장 작은 몸놀림으로 거대한 우주를 삼키려는 듯한 폭넓은 연주는 거장이라는 말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영속하는 기쁨을 누리려 순간을 포착하여 녹화해둔 ‘사랑의 꿈을 다시 한 번 감상하며 짧은 인생과 긴 예술을 실감한다.‘오, 사랑이여’ 선율의 흐름 따라 다시 한 번 사랑으로 꿈을 엮는다
며칠 전 친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장했을 때와 민낯일 때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 말하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그날 엔도르핀이 무척 많이 나왔을 것 같다.
친구가 이사 와서 처음으로 집 근처 세탁소를 찾았던 때 일이다. 마침 결혼식이 있어 나가던 길에 세탁물을 맡겼단다. 일주일 후 세탁물을 찾으러 갔을 때 주인 말씀이 ‘이번에는 어머니가 오셨군요.’ 하더란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기에 화장한 모습과 민얼굴을 구별하지 못했다. 아마도 친구가 계속 어머니와 딸로 1인 2역으로 하자면 이따금 화장을 곱게 하고 가야 하는데 친구 성격으로 보아 그냥 어머니 노릇만 할 것 같다.
여권 갱신에 필요한 사진을 찍었을 때 일화를 나도 털어놓았다.
같으면 정성 들여 화장하고 사진관에서 찍었을 텐데 무슨 맘으로 그랬는지 민얼굴에 루주만 바르고 집 가까이에 있는 COSTCO로 갔다. 아직 눈이 처지지 않았으니 이목구비만 선명하면 괜찮을 것 같고 일부러 멀리 가지 않아도 되니 편해서였다.
시간 후 사진을 찾았는데 내 얼굴과 딴판이었다. 아무리 화장을 하지 않았다 해도 팔십 노인이 따로 없었다. 말 그대로 경악이다. 사진기가 낡아서 그렇게 나왔을까. 초보 직원이 찍어서 그런 것일까.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이건 아니었다. 사진의 얼굴은 호떡같이 둥글고 넓적하여 10년 후 내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 옆에 사진을 대고 함께 보았다. 사진은 분명 본래의 모습과 달랐다. 어째서일까. 내가 보고 있는 실제 얼굴과 왜 판이할까. 사진은 주름살도 없이 팽팽한데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다시 찍을까? 이번에는 화장을 곱게 하고.
한동안 기분이 찜찜했으나 다시 찍지 않기로 했다. 다시 찍어도 이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늙은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거울로 보는 얼굴은 다소 입체감이 있겠으나 평면 지에 올려 있는 모습,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에게 자주 보일 것도 아니고 이따금 일면식도 없는 공항 직원에게 잠시 보여 줄 것인데 싶어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찍은 여권 사진이나 증명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을 때 우스갯소리로 인민군 포로처럼 생겼다고 놀렸으나 이번 내 여권 사진이야말로 그 말에 딱 맞는 모습이었다.
달 후 서울을 방문했다.입국 순서를 밟느라 공항 직원에게 여권을 제시했다. 직원은 친절한 어조로 몇 가지 묻고 여권을 건네주었다.
“실물과 사진이 좀 다르시네요. ”하고 웃는다.“그래요?” 하고 나도 배시시 웃었다.
야. 여권을 받아들고 얼굴을 약간 위로 치켜들며 젊은 사람처럼 씩씩하게 걸었다. 짐을 찾으러 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내일은 졸업앨범을들고 오겠단다. 우리는 32년 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네 아이의 엄마가 된 제자와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된 스승의 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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