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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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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열광한 영화 대부
그 영화를 모두 보았습니다.
 
그것에 살며시 비추는 의(義)라는 명분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요 게임입니다.
끊임없는 보복과 살육전
그것은 재앙입니다.
그것은 고해의 바다입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
낡은 의식의 유물을 그린 영화 대부!
 
사람마다 관점이 있을 것입니다.
관점에 따라
영화 대부를 찬양할 것입니다.
영화 대부에서 실종된 것이 있다면 
인(仁)입니다.
인이 결여된 영화는 생명의 씨앗이 사라진 영화입니다.
 
적을 막아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설정이 뿌리 깊습니다.
거의 모든 영화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의식상승 말하는 취지와는 전혀 반대죠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낡은 관념은 인류의 대병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을 잘 되게 해야만 내가 사는 시대입니다.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면 세상을 사는 의미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낡은 에너지 낡은 생각, 낡은 마음, 낡은 욕망, 낡은 의식, 낡은 삶을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을 그린 영화
밑바닥 인생이 이러하다는 내용을 담았을지언정
생명의 외경은 씨알이도 없는 영화죠.
한 가지 나타난 것은 남이 나를 도우면 나도 남을 돕는다는 인위적 관념을 비교적 그려 놓았지만
그야말로 완전한 조건의 수수관계일 뿐입니다.
인위적 수수관계!
낡은 세상에서 낡은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돋보입니다.
오직 연기력만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배우들의 연기를 찬양할 만하겠습니다.
 
허나 이 영화에서는 감동이 없습니다.
인성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 감동은 없습니다.
 
단지 있는 것이라면 고뇌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군상을 표현해 내는데
앞장섰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고뇌를 잘 그린 영화라고 평가할만합니다.
 
범부적인 인간의 고뇌 그것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목적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살상했다는 명분이 되겠는지요?
 
전쟁영화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인명살상의 대재앙일 뿐 그 가치는 없습니다.
단지 지구상에 죄얼이 임계치에 이르면 반드시 전쟁이 나타나서 인종을 쓸어버리는 현상이 있는데
전쟁의 원인은 모두 인간이 인간을 뼛속까지 미워하고 원망하고 시기 질투하는데서 시작되는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전쟁의 의미는 인간 이기심이 만드는 재앙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 깨달음이 고갈되었다는 증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낡은 의식이 가득한 곳에는 전쟁이 가난과 기아 재앙 스나미 태풍 전염병과 같은 결과만을 불러 옵니다.
 
삶이 원한을 쌓고 다시 원한을 되갚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드라마라면 그 드라마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은 없습니다.
인류가 하고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낡은 의식의 산물
그것이 바로 원한과 보복이라는 낡은 페러다임입니다.
 
영화 대부를 찬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낡은 의식으로 돌돌 뭉쳐있는 삶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고갈할 때 이 영화를 찬양하게 됩니다.
또 세상을 다 태워버리고 싶은 증오심이 가득할 때 이런류의 영화를 찬양하게 됩니다.
 
단지 인생이란 것이 삶과 죽음 따위를 체험하는 것이 전부라면 인생살이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단지 한 생을 산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인생살이에서 건질것이 없는 삶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삶이 되었든
당사자에게는 진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거친 파동의 삶들이 산재한 지구는
화약이 쌓인 창구와 같습니다.
그것은 피해 갈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낡은 의식이 가득한 삶은 오직 지옥일 뿐입니다.
 원과 한이 쌓이고 맻혀 재앙의 씨앗이 됩니다.
 
낡은 의식의 산물들 우주를 이루는 구성요소 중에 낡은 의식이 모여서
부정이 되고 증오가 되고 미움이 되며 방황이 되고 갈등이 됩니다.
 
영화 대부 1, 2, 3편을 모두 보면서 기쁨과 행복 희열 풍요 그런 것은 하나 없었습니다.
단지 죽음과도 같은 밑바닥 인생들을 보았습니다.
의식상승는 대중들의 이러한 고통을 다시 한 번 더 살피고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 더 필요했다는 것인가라는 부분을 되돌아 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지만 대개는 인간의 고통을 그린 영화들입니다.
삶에 대한 고통은 삶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시작됩니다.
삶에 대한 이해 부족은 삶의 단면을 그리게 됩니다.
때로는 환락을 그리고 폭력을 그리고 미움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에고가 그리는 애증일 뿐입니다.
그것은 모두 낡은 의식의 산물들입니다.
 
의식상승는 차라리 요즘 나온 한국영화
아저씨라는 영화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양아치를 죽이는 영화인데
그 양아치들을 죽이는 명분이 분명합니다.
역시 밑바닥 인생을 그린 영화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명분이 없으면
그런 유의 영화야말로 삼류 양아치들의 양아치 짓을 그린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인류에게는 낡은 방식이 남아 있습니다.
오직 낡은 방식만을 추앙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닥치는 생로병사의 원인입니다.
 
왜 인류에게 재앙이 있는지
왜 그런지
삶의 속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는 인류는
삶을 오직 단면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아직 많은 인류가 재앙 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환영에 사로 잡혀 실재를 허상으로 보며
허상을 실재로 알고 오직 욕망만을 쫒는 삶을 지향하게 됩니다.
 
결국 영화 대부를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의식의 진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낡은 의식이 가득한 고통의 몸부림입니다.
 
대부의 주인공 마이크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늘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요???
되묻고 싶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낡은 의식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상대를 늘 속여야 하니 당연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속여야만 하는 이 세상은
분명히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속이면서 이 세상에 대재앙이 일어납니다.
 
낡은 세상이 가르치기를
나쁜 사람을 막으려면 내가 강해져야 하고
늘 상대를 속여야 한다고 가르칠 것입니다만
그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관념입니다.
 
이제는 판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서로 속고 속이는 행위를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거짓의 울타리를 모두 걷어 내야 합니다.
 
영화 대부에서는 진실은 모두 죽고
오직 힘있는 사람만 살아남는 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오직 힘만이 사는 길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찬양하시는 분들의 삶은 큰일났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삶을 얼마나 크게 왜곡시킬런지 참으로 큰 우려가 됩니다.
 
낡은 의식의 찬양
이러한 낡은 시대의 의식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 증오와 미움, 지배욕과 권력욕입니다.
여러분은 부디 영화 대부에 공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낡은 페러다임은 낡은 의식의 산물이자 대재앙의 시작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쏟아져 나왔던 조폭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힘에 의해서 돌아가는 세상에 동조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영화들을 보면 사악한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강자가 되려는 인간의 지배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강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양아치를 찬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지배욕 권력욕과 명예욕을 그리지만
그것은 모두 에고의 모습이며 인간의 참모습은 모조리 실종 되었습니다.
 
낡은 가르침을 통해서 세상이 오로지 약육강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세뇌하기 위한 속임수들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지 않습니다.
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모두 붕괴될 것입니다.
 
조폭이나 깡패 갱단을 그린 영화들의 에너지는 저진동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낮은 진동수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대중들의 고통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맞을 것입니다.
 
낡은 에너지가 그렇게 우리의 삶속으로 다가 옵니다.
욕망의 찬양, 재물과 권세, 허망한 명예욕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거친 진동수의 삶 그것은 고난의 삶이며 고해의 바다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입니다.
 
영화에서 늘 살인을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자신을 죽이기입니다.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강력한 설정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나고
끊임없는 복수에 복수를 반복합니다.
 
인간에게는 원과 한이 있어서
어떤 임계치에 이르면 반드시 재앙을 몰고 옵니다.
 
부디 영화 대부를 더이상 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화 대부를 찬양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진동수는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마피아는 낡은 의식이 모여서 태동합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악의 씨앗은 악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악의 씨앗을 심어서 지구상에 마피아라는 악의 꽃을 피우게 만듭니다.
 
돈치치오는 비토(최초의 대부)라는 아이에게 원한을 심어줌으로 인해서
인류의 절대악 마피아를 태동시킨 원인자입니다.
돈치치오의 부모는 돈치치오라는 악의 원인자를 낳은 사람들입니다.
돈치치오의 부모에게 악의 종자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부모이고 또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옵니다.
이 악의 근원자들에게 악의 꽃이 피우는 이유는 모조리 전생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항상 원인자는 그들 부모로부터 이어져 내려옵니다.
인류의 절대악 마피아 조직의 태동은
돈치치오와 비토라는 어린 아이가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이렇게 가문에 악의 종자들이 만들어 지는 이유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이어 집니다.
즉 그들의 조상으로 부터 이어져 내려 옵니다.
 
대개 집안에 악이 종자가 나오는 이유는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때 악의 씨앗을 뿌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결과 인류의 대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전생놀음과 같습니다.
 
비토라는 어린아이가 마피아의 대부로 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악의 중심축에 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전생에 뿌린 악의 씨앗으로 인함입니다.
 
현생의 뿌리는 전생으로부터 이어집니다.
전생에 하던 것을 현생에 와서도 되풀이 하니
현생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전생을 헤아려 볼 수도 있습니다. 
 
낡은 의식이 너무 가득하면 상승하기 어렵습니다.
의식이 빠른 속도로 빛으로 화해야 하지만
진화의 속도는 더욱 하강합니다.
낮은 진동수의 삶이란 고해의 바다입니다.
 
낮은 진동수에서는
전생에 누군가를 죽였거든 나 역시 이번 생에서 죽음을 당함으로서 전생의 죄얼을 탕감합니다.
그것은 낮은 진동수에서 늘상 일어나는 낡은 프로그램의 결과물들입니다.
낮은 진동수에서는 업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스승을 만나 의식이 높은 진동으로 거듭난다면
카르마의 과정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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